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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26 낭독봉사 :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눈이 된다는 건

백수의 하루는 생각보다 더 단조롭다. 해야만 하는 일, 예를 들면 학교 수업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 몰랐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시작이라도 해 보자니 끈기가 부족해서 쉽게 그만두곤 했다. 하고 있던 것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 둘 놓게 되면서, 나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 한, 두 달은 자유로운 기분이었지만, 그 시기가 지나자 딱 그만큼의 두려움과 위기감이 몰려왔다. 거기에 부모님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더해지니 어깨가 한참 더 처졌다. 그러다 문득, 다들 바쁘게 일하러 간 순간에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생기면 자존감은 바닥을 치곤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라는 존재 이유가 불명확해진다는 데 있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 이 세상에서 나는 별로 의미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나 자신이 먼지와 다를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는 그 하찮은 기분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무엇인가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그 마음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2시쯤 되니, 그 시간엔 잘 울리지 않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입니다. 류재희 님 맞으시죠? 작년 12월에 신청해주신 녹음 봉사를 이제 시작하실 수 있게 되어 연락드렸습니다. 교육받으러 오세요!" 녹음 봉사? 사실 전화를 받은 당시엔 그런 걸 신청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를 받던 날은 신청한 날보다 반년이나 지난 여름날이었다. 알고 보니 녹음 봉사는 신청자가 많은데, 결원이 생길 시에만 충원하는지라 늦게 연락이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교육을 받으러 갔던 날도, 평일 저녁 시간이었는데 어린 학생들부터 아주머니, 아저씨 연령대까지 50명 정도 되는 인원이 복지관의 지하 강당을 꽉 채우고 있었다. 따뜻한 마음이 모이는 곳, 잊고 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사실 봉사를 신청할 때만 해도 목소리로 봉사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녹음 도서를 제작하는 과정은 그러한 환상과는 거리가 멀다. 녹음을 하다 보면, 평소 책을 소리 내어 읽어 본 적이 잘 없던 탓에 혀가 계속 꼬이고,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면 책 내용을 다 외울 지경이 된다. 한 번 갈 때 평균 약 2시간 정도 녹음을 하는데, 컨디션이 좋은 날이라도 시간이 갈수록 목이 칼칼해지고, 목소리엔 힘이 떨어진다. 온몸에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때면 ''을 하는 것이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인지 몸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2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도 녹음되는 분량은 약 20페이지 남짓이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다 녹음하는 데, 짧게는 2개월 길게는 6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사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대장정인 데다, 집에서 복지관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자주 다니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로 아직 첫 번째 도서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게다가 한 평이 채 안 되는 녹음실은 아주 작고, 방음을 해야 하다 보니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그 작은 곳에서 직접 프로그램을 실행하여 홀로 마이크에 대고 녹음을 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그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사막 같던 내 일상을 적시는 작은 오아시스가 되었다. 백수 생활을 하며,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진 내가 이른 아침부터 집 밖으로 나오는 날은 녹음실에 가는 날 뿐이다. 나의 목소리가 보지 못하는 분들의 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기적과도 같다. 그리고 그 기적은 나 자신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내 존재 이유에 대한 불안함을 떨칠 수 있게 해주었고,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게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었다. 학교 수업이 없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단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기적을 만들러 갈 것이다. 혹 누군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꼭 권하고 싶다. 함께 기적을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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